운명을 연기하는 남자, 상세예
1930년대 북평(베이징의 옛 이름)의 무대에 한 남자가 서는 순간 객석은 숨을 멈춘다. 그는 상세예(윤정)다. 경극 ‘단(旦)’역의 천재 배우이자 예술 그 자체로 살아가는 인물이다.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경극단 ‘수운루’에 팔려온 그는 혹독한 훈련과 학대를 견디며 무대 위 전설이 된다. 하지만 사람들과는 늘 어긋나고 거짓말을 못하는 융통성 제로의 성격은 그를 외로운 존재로 만든다.
그럼에도 상세예는 관객의 심장을 울릴 줄 안다. 양귀비, 왕소군, 귀비들의 화려한 복식을 입고 무대 위를 날아다닐 때 그는 예술이라는 환상을 실현시킨다. 경극이 무엇인지 몰랐던 이들도 그가 무대에 서면 빠져들고 만다. 이런 상세예가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 순간 한 남자가 등장한다. “잠자리를 생각나게 하면 그건 경박한 거고, 사랑하고 싶게 만들면 매력이 있는 거야.” 상세예가 표현한 정봉태다.
예술에 빠진 남자, 정봉태
정봉태(황효명)는 부유하고 유능한 사업가다. 단정한 외모, 날카로운 판단력, 가정과 사회 모두 완벽한 역할 수행을 하는 그의 삶은 겉보기엔 ‘성공’ 그 자체다. 하지만 무대 위 상세예를 본 순간 모든 것이 달라진다.
경극을 무시했던 정봉태는 상세예의 ‘양귀비’를 보며 말없이 눈물을 흘린다. “그는 내가 살아오며 버린 모든 꿈을 대신 살아준다.” 정봉태는 그렇게 상세예에게 빠져든다. 그에게 상세예는 단순한 배우가 아니다. ‘나와 영혼이 통하는 사람’으로 세상에 단 하나뿐인 존재다.
정봉태는 수운루의 대주주가 되어 상세예를 돕고 그의 예술이 꺾이지 않도록 보호한다. 사업가로서는 손해일지도 모를 결정이다. 하지만 그는 상세예에게 말한다. “나한테 맡겨요.” 정봉태는 상세예 앞에선 언제나 해결사이자 동반자다.
사랑, 혹은 영혼의 소통
‘빈변불시해당홍’은 브로맨스로 포장되었지만 정봉태와 상세예의 관계는 단순한 우정을 넘는다. 이는 사랑이다. 육체적 표현은 없다. 그러나 그보다 더 진한 애정과 영혼의 교감을 보여준다. 상세예는 말한다. “정봉태는 나를 이해하는 사람이야. 우리 사이의 친분은 달라.” 그는 정봉태를 위해 생명을 내줄 수 있고 정봉태는 그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다.
정봉태가 혼수상태에 빠졌을 때 그의 아내인 범상아는 미망인을 자처한다. 하지만 상세예는 포기하지 않고 정봉태 곁을 지킨다. 그의 간호 덕분에 정봉태는 기적처럼 깨어난다. 이 장면은 이들의 관계가 얼마나 깊은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범상아, 시대의 희생자 혹은 이해자
정봉태의 아내 범상아(사시만)는 정봉태에게 한눈에 반해 지참금을 들고 시집온 전통적인 여성이다. 그녀는 정봉태를 진심으로 사랑하지만 그의 감정이 자신에게 없는 걸 느낀다. 범상아는 정봉태의 누나 정미심(류민)에게 하소연한다. “남녀 사이의 사랑이라는 게 뭘까요? 언니의 동생은 날 사랑하지 않아요.”
처음엔 상세예를 질투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그들 사이의 유대감을 인정한다. 정봉태를 향한 무조건적인 사랑을 넘어 그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는 인간적인 연민으로 변화한다.
시대와 예술, 그리고 저항
‘빈변불시해당홍’의 배경은 일제의 탄압과 전쟁의 먹구름이 드리워진 1930년대다. 경극 역시 변화의 소용돌이에 놓인다. 상세예는 고전 가사를 개사하며 경극을 민중의 것으로 만들고자 한다. 그러나 이는 기존 경극인들의 반발을 부른다.
그럼에도 그는 물러서지 않는다. “경극은 살아 있어야 해요.” 그는 연극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 정봉태에게 영화화를 부탁하기도 한다. 이것은 예술에 대한 진심 그리고 한 시대의 기록을 남기려는 저항이다.
인물들의 이야기, 슬픔과 충돌
이 작품은 상세예와 정봉태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 주변 인물들도 각자의 서사와 감정을 품고 있다.
소래(이명주)는 문맹인 상세예를 위해 모든 서류를 대신 읽어주던 비서다. 그녀가 일본군에게 유린당한 채 죽자 가슴이 산산조각난 상세예는 그녀를 위해 그녀와 영혼결혼식을 올린다. 소래의 이야긴 가슴이 너무 아파서 눈물을 쏘옥 빼버린다.
조귀수(당증)X고대리(황성의)는 사랑은 없지만 책임은 있다. 고대리는 아이를 낳고 조귀수에게 맡긴 채 일본군과 맞서 싸우다 죽는다.
정미심은 돈과 권력 앞에 사랑을 버린 여자다. 조귀수는 정미심이 자신을 필요할 때만 찾는다는 걸 알면서도 늘 응한다.
경극의 아름다움과 드라마의 완성도
‘빈변불시해당홍’은 단순한 BL 서사도, 시대극도 아니다. 예술과 인간, 사랑과 신념, 시대의 굴곡이 어우러진 대서사다. 우정 프로덕션은 중국 경극의 대가 비구윤(Bi Guyun 1930~1923)을 감독으로 영입해 윤정의 연기를 연출한다. 200벌 이상의 수작업 의상과 정교한 세트는 1930년대 북경을 그대로 재현한다.
연출과 편집, 음악은 군더더기 없이 흐르고 디테일은 살아 숨 쉰다. 인물들은 살아 움직이며 그 감정의 결은 보는 이의 가슴을 찌른다. ‘패왕별희(霸王别姫, Farewell My Concubine, 1993)’를 떠올리게 하는 감정의 깊이도 느낄 수 있다.
결말: 운명보다 깊은, 영혼의 동반자
결국 이 드라마의 핵심은 하나다. 정봉태와 상세예는 서로의 ’지음(知音)‘이다. 서로를 이해하고 그 이해를 위해 살아간다. 육체가 아닌 영혼의 사랑이다. 사회적 조건, 전쟁, 억압 속에서도 끊어지지 않는 유대다. 그들의 마지막 선택은 말보다 더 많은 것을 전한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감정이다. ‘나는 너를 안다. 그래서 그 선택이 맞는 걸 안다.’
마무리: 사랑, 예술, 저항, 그 모든 것의 기록
‘빈변불시해당홍(鬓边不是海棠红, Winter Begonia, 겨울 베고니아)’은 말한다. 사랑은 형태를 갖지 않아도 존재할 수 있고 예술은 권력보다 오래 남는다. 경극이 낯설더라도 이 드라마는 그 안의 영혼을 보여준다. 한 시대를 살아간 이들이 지켜낸 사랑과 신념 그리고 무대를 보여준다. 드라마가 끝나도 마음에 오래도록 남는 작품이다.
작품 정보
• 드라마 제목 : 빈변불시해당홍(鬓边不是海棠红, Winter Begonia, 겨울 베고니아)
• 장르 : 중국드라마, 탐개극, 경극, 역사, 로맨스, 전쟁
• 편수 : 총 49부작
• 방송 : 2020.03.20.~04.19.
• 스트리밍 : TVING, WATCHA, Wavve
• 원작 : 수여천아(水如天儿)의 소설 ‘빈변불시해당홍’
• 각본 : 구임(久任), 투주야래(渝州夜来)
• 감독 : 혜해동(惠楷栋), 궈하오(国浩)
• 등장인물(출연배우): 상세예(윤정), 정봉태(황효명), 범상아(사시만), 범연(미열), 증애옥(탕정미), 찰찰아(장역혜), 정미심(류민), 조귀수(당증), 고대리(황성의), 소래(이명주), 두칠(이택봉), 십구(방안나), 주향운(황성완), 대성(상술), 석월홍(정룡), 유월홍(하서현), 장몽평(백빙), 상지신(지수), 유한운(후암송), 상국정(왕무뢰), 강송수(금사걸), 강등보(왕석조), 진인향(단건차), 사희아(손적), 녕구랑(손적), 후옥귀(심보평), 유청(고우인), 조만균(장영강), 사카타(이앙), 춘행(장천운)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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